[기고] 한국 ‘기후소송’ 판결, 역사의 이정표 되길
05 Sep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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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경향신문
기고: 박민혜 WWF 한국본부 사무총장
원문: 경향신문 웹사이트
올해 8월 한국의 폭염 일수는 전국 평균 16.9일로 역대 1위를 기록했다. 달갑지 않은 기후 신기록과는 달리 기쁜 신기록 소식도 있었다. 바로 국내 최초의 기후소송 결과이다. 지난 8월29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아시아 최초로 기후소송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2030년부터 2050년 탄소중립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정량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온실가스 감축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미래 세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것으로 국가의 국민보호 의무를 위반했다는 취지였다. 한국 정부의 부실한 기후위기 대응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인정된 판결이었다.
이번 소송 결과는 아시아 최초라는 점에서 아시아 국가의 기후행동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이 같은 ‘안정된 기후에서 살 권리’는 이미 국제적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지난 1년간(2022년 6월∼2023년 5월) 190건의 기후소송이 제기되었으며,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정부의 소극적 기후대응을 위헌으로 판결한 바 있다. 헌법은 아니지만 프랑스에서도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승소했고, 미국 몬태나주에서도 정부를 상대로 한 법률 소송에서 청소년들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의 법적 의무를 권고하는 국제법 소송도 진행 중이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지난해 3월 유엔총회가 채택한 결의안에 따라 기후위기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국제법적 의무 여부 및 책임에 대한 판결을 준비하고 있다. 태평양 섬나라인 바누아투는 기후위기로부터 보호받을 권리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자문 의견을 구한 상태다. 세계자연기금(WWF)은 국제사법재판소의 자문 요청을 받아 지난 7월 국가의 기후 및 자연에 대한 대응이 국제 인권법의 의무를 준수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취지의 공식 의견서를 제출했다. 또한, 국제 자연보전기관으로서 전 지구를 아우르는 자연의 위기에 대해 기후대응뿐 아니라 생물다양성을 포함한 자연 보전이 지속 가능한 인간의 생존에 있어 필수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 의견은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럼에도 각 국가의 기후 정책 방향성을 제시하고, 국제 협상에서 법적 근거가 되며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 사례와 같이 세계 각지에서 진행 중인 기후소송 판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같은 국제 흐름에서 한국의 기후소송 결과는 올바른 방향으로 이정표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이 의미가 있으려면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어져야 한다.
우선 소송의 주요 쟁점이었던 온실가스 감축 목표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2030년 이후 목표를 수립하지 않고 있다. 당장 내년에 2035년 감축 목표를 유엔에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후소송 취지를 반영한 강화된 목표를 수립해야 한다. 정부는 국제 사회가 제시하는 2035년 60% 감축으로 목표를 상향 조정하고, 이를 뒷받침할 2050년까지의 단계별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감축 목표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현실성이 다소 부족한 분야에 대한 부문별 감축 지원을 확대하고, 이행 관리를 위해 2030년 이후의 감축 이행 및 관리에 대한 법률 규정도 마련해야 한다.
이번 소송 결과를 통해 기후위기 대응이 한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논의되길 바란다.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부족으로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미래 세대인 청소년, 기후변화 취약국으로 더 많은 피해를 입는 바누아투에선 각각의 시민이 소송 주체라는 점에서 정부는 국내외 청구인들을 위해 법적 의무를 다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는 기후위기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온실가스 배출량 상위 10% 나라로서 국제사회에 책임 있는 대응을 할 때에 비로소 신기록의 의미를 누릴 자격이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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